권등암장 소개 (본 등산학교의 전용교육장)
권등암장 개척기 |
권등암장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과 무악동, 냉천동, 봉원동, 연희동을 품안에 두고 있으며 무악재 고개를 경계로 인왕산과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산 이름은 안산이라 한다. 이 곳의 암장은 높이 100M, 폭 200M 정도에 달하는 독립된 바위로서 바위 전체가 설악산에 위치한 울산바위와 흡사한 하나의 큰 바위덩어리로 형성되어 있다. |
처음에는 필자의 능력에 맞는 높은 난이도만을 개척해 놓았으나 등산학교를 개교한 후부터 교육생의 수준과 교육진도에 맞는 루트들로 재정립(개척)해 놓았다. 이는 본 등산학교 교육생이 교육기간 중 체계적으로 등반교육(등반시스템과 실전등반)을 최대치로 향상시킬 수 있는 최적의 암장(교육장소/교육환경)으로 탄생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국내 교육기관 중 본 등산학교만이 유일무이한 전용암장을 보유하고 있게 된 동기 또한 되었다. 이는 설령 학교에서 잘 가르쳐 준다 해도 교육적 환경이 완비되어 있지 않으면 교육생에게 살아 전달되는 교육 또한 될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권등암장은 교육생이든 동문(졸업)이든 약속 없이(평일은 물론) 찾아와도 권등인들을 볼 수 있으며 설령 처음 보는 관계라도 자신의 암벽반 기수를 전달함으로 자일을 엮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의 행복이라 할 수 없는 본 등산학교만의 혜택 중 하나인 것이다. |
또한 교통 및 접근, 주차, 식사, 식수, 야영, 암장의 난이도 등 모든 교육적 환경이 등산학교 교육장으로서 완벽한 7박자의 화음을 갖추고 있기도 하다. 이는 전국은 물론 세계 어느 곳의 암장과 비교해 봐도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는 곳이 본 등산학교의 전용암장인 권등암장이라 말할 수 있다. 권등암장의 루트별 등급을 보면 5.7급부터 5.13a까지 다양한 등급의 루트가 분포(개척)되어 있으며 건강한 화강암으로 되어있는 반면 일부는 퇴색된 푸석 바위로도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루트는 한 급수 또는 한 등급 올려 쳐주어도 과언이 아닌 루트이다. 권등암장을 개척한 동기는(2015년 기준) 33년 전(1982년) 인수봉 등반 중 필자가 사고를 당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른쪽 발목을 자유롭게 못 쓰는 장애에 이르게 된다. 1년여 동안의 투병생활은 좌절과 절망을 경험하게 했고 25세의 젊은 나이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들이었다. |
어찌 그 때의 시간들을 글로 표현할 수 있으랴!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오름짓에 익숙한 필자가 아니었던가! 퇴원 후 통원치료를 받던 어느 날 집안 툇마루에 앉아 먼 곳에 시선을 둔다. 어~! 저기에 절벽(바위)이 있네! 그 곳이 안산이었던 것이다.(필자 집은 서울 종로구/안산은 큰길 건너 서대문구) 즉 사고 전에는 안산에 있는 암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그때 당시 25년 동안 살았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등반을 했음에도...) 그 것은 그 당시 도봉산의 선인봉, 북한산의 인수봉으로 등반을 가는 것이 그 시대의 흐름이었기 때문이다.(지금처럼 자연암장이 전국 각처에 개척되어 있지 못한 시절) 즉 사람이 큰일을 겪고 나면 성숙해진다고 할까! 등반사고를 계기로 시야가 트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목발을 짚고 안산(봉수대 바위)에 올라가 보니 이곳에 자주 온다는 분이(봉원동 거주) 혼자서 등반을 하고 있었다. 등반루트를 살펴보니 3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었으며 실 크랙에는 철근으로 만든 확보지점이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루트마다 닥트링이(인위적으로 바위를 까냄) 수 없이 파여 있는 것을 보고 내심 충격이었으며 그 크기는 운동화 신고 자일 없이도(솔로) 오를 수 있는 사장된(죽은) 루트라 할 수 있었다. 시간은 흘러 친구와 목발을 짚으며 설악산과 지리산 정상까지도 올라보고 직장도 목발 짚고 다녀보았으나 산은 필자의 노력만큼 받아주는데 반해 세상의 일은 그러하지 못했다.(목발을 짚는다는 이유) 그러나 무엇에 미치면 세상의 시련도 견딜 수 있듯 그 와중에 누워서 할 수 있는 운동과 그 상황에 할 수 있는 모든 근력운동을 거듭한 결과 의지로 똘똘 뭉친 필자의 다리는 회복되어 갔고 어느덧 두 가지의 목표가 나의 가슴을 요동쳐오는 것을 느꼈다. 하나는 나의 다리를 찾아 그 곳으로 간다는 것과(사고 난 루트) 또 하나는 안산의 암벽을 암장으로 개척하자는 것이었다. |
그러나 발목이 구부러지지 않는 장애의 고통은 지금까지 떼어낼 수 없는 필자의 삶의 영원한 현실이 되었다. 슬프다! 그러나 필자는 그 현실을 직시했다. 그래! 죽을 자신이 없다면 나의 현실을 인정하자! 그렇다면 이 고통을 즐기자! 그리고 나의 다리를 찾자! 그렇다면 나의 다리는 과연 어디 있는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나의 다리는 산에 있었던 것이다. 병상에 누워있을 때는 나의 다리 나의 삶을 산이 빼앗아 갔다고 좌절하곤 했다. 그러나 산은 나의 다리를 빼앗아 간 것이 아니라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다리 나의 삶을 찾아 내가 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산이요! 등반이 아니겠는가! 어느덧 목발을 놓았다. 그리고 3주 후 나의 삶을 바꿔 놓은 그 곳 그 루트에 도착하게 된다. 내가 이곳에 다시 온 이유는 나의 다리를 찾으러 왔던 것이며 이곳을 넘지 못하고는 어느 것 하나 할 수 없는 나의 고집 나의 운명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이곳을 향해 집을 나설 때는 긴장했을 터인데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이 정도쯤이야' 라는 오만함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오만함이 아닌 1년 동안의 시련이 나에게 10년 이상의 경륜(발전)과 시야를 가져다준 자신감이었다. 결국 필자는 두 번째 목표를 향해 안산의 암벽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선 개척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한 후 최대한 자연적 바위흐름을 가지고 정상까지 이어지는 루트를 살펴보니 아주 좋은 그림이 나온다. 결국 안산 암벽에 필자의 첫 루트가 탄생되었고 지금까지 수많은 루트를 이곳에 개척해 놓았지만 이 루트는 지금도 권등암장의 대표적인 루트가 되었음은 물론 봉수대의 정상을 잇는 유일한 루트 또한 되었다. 최고 난이도 5.12b를 자랑하고 있으며 루트명은 “어린아이길”로 명하였다.(5월 5일 어린이날 개척) 권등암장에서 대다수의 길을 개척할 때 의미 있던 과정은 필자 혼자 모든 것을 개척했다는 것과 손 해머(망치)로 모든 볼트작업을 일구어 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무엇으로 표현해볼까! 예를 들어보자! 집에서 시멘트 못 1개를 벽에다 끝까지 박아보라!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12㎜ 앵커볼트의 굵기(길이 3.5㎝)를 화강암 바위 속에 뚫는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그 당시는 요즘과 달리 전동드릴은 상상도 못할 시절이었다. 또한 개척할 때마다 최대한 바위의 흐름을 살려 개척하려는 루트파인딩은 실로 프로기사들이 기반(바둑판) 위(반상)에 한 점을 놓기 위해 혼과 넋을 불어넣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음은 물론 그에 수반된 준비과정 등은 수많은 확보물을 설치하는 것보다 더욱 힘든 일이었으며 아울러 필자의 가슴속에 밀려드는 그 무언가의 외로움,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추락에 대한 공포심, 개척비용을 감내하는 부분들은 필자를 더욱 힘들게 한 과정들이었다. 시간은 흘러 등반세계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사상 초유의 사건이 이곳에서 발생하고 만다. |
권등암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 5월이었다. 첫 루트인 어린아이 길을 시작으로 연이어 5개의 루트를 개척했다. 그러나 1년 후쯤 5개의 모든 루트의 볼트가 뽑혀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실화에 비하면 이것은 서곡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때 필자의 심정 또한 어찌 표현할 수 있으랴! 한동안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 그해 가을 기존루트를 다시 보수한 후 몇 개의 루트를 더 개척해 놓았다. 세월은 다시 흘러 1년 정도 되었을까! 또다시 모든 루트가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되고 만다. 어찌 이런 일이 반복되어 일어난단 말인가! 필자는 두 번째 볼트도난 사건 후 산에 대한 깊은 실의를 느껴 그해 등반시즌을 마감하고 만다. 그 후 이곳에서의 개척등반은 포기하자 했지만 나의 시선은 언제나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의 의지와 달리 말이다! 그럴수록 괴로움은 더해만 간다. 그 범인이 어찌 밉지 않을 수 있으랴! |
그러나 운명은 피해갈 수 없는 법, 미워지는 만큼 나의 의지 또한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내 어찌 피해갈 수 있으랴! 필자는 어느덧 이곳에서 3번째 보수작업을 시작하였고 그 후 또다시 6차례의 볼트도난 사건이(총 8차례) 연이어 벌어지는 사태를 필자는 겪게 된다. 여러분! 믿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필자가 개척한 루트들만 도난을 당한단 말인가! 실로 통탄하고도 남을 일이다. 그때부터 필자는 마음을 비웠다. 그래! 너는 빼라~ 나는 박으련다. 필자는 우직한 돌쇠작전으로 다섯 번째 도난사건의 모든 루트를 복구한다. 그런 후 이곳 암장을 보호하기 위해 1998년 산 관련 월간지에 권등암장을 기고하게 된다. 솔직히 이 곳 암장은 필자의 주위 사람들과 조용히 등반하고 싶었던 곳이었다. |
그러나 범인 찾기가 힘든 상황이라면 필자의 욕심을 버리고 암장의 루트를 사수하는 쪽이 올바른 선택이란 결론에 월간지에 발표하게 된다. 그 후 많은 등반자들이 찾아왔고 그로인해 권등암장은 볼트도난 사건이 한동안 잠복기에 들어선다. 그러나 필자는 암장개척 발표에 의한 생각치도 못한 후유증에 또다시 시달리게 된다. 등반자들의 인산인해로 인한 암장의 오물 및 쓰레기는 필자의 또 다른 업보로 받아들이게 됐고 일요일은 물론 주중에도 주변청소를 하는 것이 지금까지 일과가 되었다.(현 2015년 까지) 그로인해 지역구청에 화장실에 관한 지원을 수 없이 제기하였으나 그의 관한 지원은 약속했으나 그 시기는 언제일지 모른다는 답변만 몇 년째... 결국 화장실은 그 당시 필자의 돈으로 구입하여 암장에 올려놓게 된다. 그러나 돈으로 구입한 것보다 화장실을 들어 올리는 과정은 우리 네 식구(당시 아들: 초등학교 3학년, 딸: 초등학교 1학년, 아내)가 히말라야의 정수리를 오르는 것만큼 힘든 과정이었다. 오죽했으면 화장실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눈물을 흘렸는지 지금도 생각하면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껴볼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권등암장의 시련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잠잠했던 볼트도난 사건이 또다시 일어남은 물론 그 후 화장실까지 잘려나가는 초유의 사건이 또다시 벌어지고 만다. 이것은 영화에서나 꾸며지는 시나리오가 된 것이다. 이 때가 대략 2001년도쯤인가 싶다. 시간은 다시 흘러 여덟 번째 도난당한 루트를 보수한 필자는 범인 잡기에 직접 나서게 된다. 이 때는 필자가 1985년경부터 충무로에서 인쇄업을 운영하고 있었고 생활 또한 여유가 있었던 시기였다. |
망원경을 구입한 후(사진기 준비) 5일간 이곳에 잠복하며 범인 찾기에 나선다. 그러나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원인을 분석해 보니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필자의 동선을 알고 있는 주위 사람 중 한명일 것 같았다. 가장 먼저 의심 가는 사람을 지목하게 된다. 어느 날 그에게서 전화가 온다. ‘기열아! 내일 바쁘니?’ 또는 필자의 사무실에 자주 찾아와 '이번 주는 뭐해?' 라며 필자의 동향을 오래 전부터 묻던 그였다. 또한 그는 처음 이곳 암장에서 만나게(등반)되었고 필자와 친밀한 3년 연배로서 볼트도난 사건이 일어나면 그에게 먼저 알렸고 그 또한 위안과 격려를 따뜻하게 전해주는 둘도 없는 형제와 같았다. 그런 그를 의심하는 필자의 마음은 매우 힘들었으나 인간의 본능은 필자 또한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필자는 그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2박 3일간 설악산 등반이 있다고 말이다.(거짓) 다음 날 필자는 떨리는 심장으로 이곳에 잠복해 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째 잠복하고 있던 날 사무실에 업무관계로 통화하는 중 그의 전화가 왔었다고 한다. 왠지 불안하다. 설악산에 갔다는 걸 알면서 필자의 출근확인을 직원에게 묻다니! 그 순간 불안감이 무섭게 밀려온다. 만약 그가 범인이라면 어찌 대면한단 말인가! 그를 믿어온 필자의 마음이 산산조각 난다는 것이 더욱 무서웠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누군가 루트 위에서 자일을 내린다. 망원경을 보니 그였고, 범인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곳으로 달려가지 못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 솔직한 표현은 그를 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며칠 후 그가 사무실로 찾아온다. 잘 다녀왔냐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난 그에게 침착하게 전한다. 왜! 그랬냐고... 그는 완강히 부인한다. 결국 증거사진을 보여 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곳에서 네가 나보다 더 유명해지는 것이 싫었다라고 하며 무릎을 꿇는다. 나는 대답했다. 앞으로 이곳(사무실)과 그곳(암장)에는 나타나지도 말라고 대신 나 또한 당신이 한 짓을 세상에 알리지 않겠노라고... 이 영화와 같은 스토리는 권등암장 개척기로 인해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나 그 범인의 이름은 필자의 마음속에 묻혀진 채 사상 초유의 볼트도난 사건은 영원한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
세월은 흘러 권등암장은 또 다른 역동의 시기를 맞이한다. 등반가들의 증가와 더불어 일반적인 사람에게도 산의 대상이 건강증진을 위한 일상적인 생활 속의 공간으로 찾아오는 변화가 시작되었고, 이들의 발걸음은 권등암장의 바윗길 주변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로인한 크고 작은 사고와 무분별한 등산로의 길들이 생겨나는 것을 감지한 필자는 그들이 지나다닐 수 있는 바윗길을 안전하게 정돈함은 물론 토사가 무너지는 곳마다 32년간(1983년∼2015년) 200여 차례가 넘는 주변공사를 착수하게 된다. 수백 개의 돌을 주워 모으고 그것도 모자라 400만원(돌 값)이 넘는 자연석을 채석장에서 구입함에 있어 또 다른 험난한 등반이 시작되었다. 구입한 돌들은 물론 40㎏의 시멘트와(200포대 이상) 모래, 왕사 등을 세상 밑에서 지고 올라오는 본 등산학교 동문들의 노고와 이것들을 배합하기 위한 엄청난 분량의 물의 공급 등은 주변의 공사과정은 거두절미하더라도 너무나 힘든 끝없는 수행의 길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권등인의 자발적 참여로 지금의 권등암장을 이룰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사막의 모래를 퍼내 바다로 만들었다 표현해도 필자에게만은 과언이 아닐 듯 싶다.
1. 32년간 “권등암장”을 개척한 총 경비는 필자의 사비만 구천만원 이상 들었음.
아울러 권등암장은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권등암장 뿐이 아닌 국내 모든 등반대상지는 이들로 인해 황폐해지고 있다. 물론 이들의 전부는 아니겠지만 필자는 이들의 전반적인 활동을 관찰해온 결과 2006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리지와 암벽등반을 하는 무질서한 인터넷카페 산악회가 우후죽순 생겨남에 있어 산과 등반에 관한 철학과 윤리, 규칙과 규율, 등반과정에 대한 총괄적 등반시스템 부재 등이 큰 문제로 나타남은 물론 더욱 황당한 일은 등반에 관한 전반적인 경험이 일천한 인터넷카페 산악회가 OO카페 등산학교라는 명칭 하에 등산학교 교육을 주관하는 작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그로인해 국내의 등반사고의 대다수는 이곳에서(인터넷카페 산악회 회원) 발생→진행되어 고귀한 생명과 소중한 건강을 잃어버리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들은 개척자가 수많은 시간과 피땀 흘린 노력으로 일구어낸 암장을 아무 대가없이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노고의 말 한 마디는커녕 이랬느니, 저랬느니, 불평과 불만은 물론 자신의 등반능력 부족으로 못 올라가는 특정루트를 닥트링(바위를 파냄)을 친다든가 볼트거리가 멀다고 구간사이에 개척자 몰래 볼트를 설치하는 등 등반세계의 범법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아울러 주위 시설물 등을 훼손하는 것도 모자라 고기구운 기름과 과일 껍데기 그리고 수많은 쓰레기 등과 담배꽁초를 암장주위에 버리고 가는 일 등 자연보호법에 위반되는 점을 떠나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무도 망각해버리는 독버섯 같은 일들이 이들에 의해 나날이 더해지고 있으며 더 많은 그들이 이러한 집단에서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집 안팎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집 앞마당을 밟으면 더욱 난리칠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비등산로를 등산로로 만들 양, 풀과 잡목을 마구 밟음과 동시에 토사를 무너트리는 일탈을 일삼기까지 하고 있다. 토사가 짓밟히면 나무와 풀이 살아남기 힘들고, 나무와 풀이 없으면 풀벌레가 없게 되고, 풀벌레가 없으면 새가 날아들지 않으며, 새가 날아들지 않으면 우리 인간의 마음은 더욱 피폐해져 간다. 한마디로 자연환경에 관한 개념은 개판에 이르렀음은 물론 남 욕, 남 흉, 참견, 고성, 무질서, 가는 자리, 머물렀던 자리에 오물투척과 지정된 장소가 아닌 곳에서 버너사용과 음식물찌꺼기, 생리적인 대/소변 처리방식은 물론 산불화재를 일으킬 수 있는 모닥불 등 모든 흔적의 뒤처리는 뭐라 표현할 단어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지켜보고 있던 국립공원관리공단 및 지역 지자체에서는 그들의 만행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급기야 암장폐쇄 조치와 같은 사상 초유의 일을 실시한다. 이러한 특단의 조치에 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하기는커녕 어리석은 이들의 공범들은 국립공원관리공단 및 공공기관에 불평과 불만 등으로 볼멘소리를 전하고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이 대목에 관해 심층 거슬러 올라가보면 10여 년 전부터(2015년 기준) 국립공원관리법에 의해 설악산의 등반대상지인 많은 루트와 암장이 폐쇄되어가고 있고 북한산 야영장 축소 및 폐쇄 논란에 휩싸이는 가운데 2014년에는 북한산 일원의 몇몇 지역암장의 경우 국립공원관리공단에 의해 암장이 폐쇄되는(모든 확보물 제거)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우리는 이러한 공공기관의 일방적인 조치에 강렬한 불만의 목소리를 표시하고 있지만 실은 이 모든 결과는 우리들로 인해 초래된 결과이기도 하며 특히 등반교육기관이나 정통 산악회의 행위라기보다는 대다수 우후죽순으로 생성되고 있는 무분별한 인터넷카페 산악회에서 자행한 행위로 벌어진 결과라 해도 극히 틀린 결론은 아닐 것이다. 한 번은 등반대상지에서 이들에게 계도를 하니 어느 곳이든 내발로 와서 행함이 자신의 자유이며 권리라며 왜! 자신이 제재를 받아야 하냐고 따진다. 그렇다면 앞서 이야기했듯 자신의 집 안팎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집 앞마당을 허락 없이 밟아도 그의 자유이며 권리라는 말인가! 즉 자유와 권리는 자신의 행함에 앞서 상대 & 대상지에게 우선적으로 지켜줄 의무가 이행될 때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행사할 수 있음을 우리 모두는 모르고 있으며 정녕 모른단 말인가! 앞으로 독버섯 같은 공범들의 작태가 자행되는 한 우리의 터전(대상지)과 입지(자유)는 점점 좁아질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각인해야할 것이다.
“권등암장”의 40개 루트를 간략하게 설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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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등암장을 필자 혼자서 대다수의 루트를 개척한 날들이 32년이란 세월이 지났다.(2015년 기준) 지금껏 투여된 자금과 필자의 노고 및 성취감은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 권등암장의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필자의 헌신은 둘째 치더라도 암장의 루트가 8번 이상 도난을 당하는 과정에서 오는 정신적 아픔, 보수작업 시 바위의 도난구멍(흔적)이 있는 옆에, 또 다른 볼트 흔적을 남겼다는 것에...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아픈 마음으로 기억된다. 아울러 지금의 권등암장이 있기까지 용기와 격려는 물론 수많은 보수작업과 주변공사에 참여해 주신 권기열등산학교 동문 여러분께 이 지면을 통해 다시 한 번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한다. [2015년 권등암장 개척 32주년을 맞이한 즈음] 씀. “권등암장” 찾아오는 길지하철 3호선 무악재역 3번 출구로 나와 곧바로 150m 정도 무악재고개 방향으로 향하면(오른쪽으로 푸르지오 아파트 단지) 첫 번째 골목인 길모퉁이 좌측에 [노리터공인중개사무소]와 [현대자동차] 정비소가 있는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곳을 끼고 100m 정도 오르면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왼쪽 직진길로 올라야 한다. 거기서 언덕길을 200m 정도 오르면 공터가 나오며 12시 방향에 자락길 다리를 지붕 삼아 돌계단을 5분 정도 오르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되 왼쪽 능선으로 오르지 말고 자연스럽게 등산로를 오른쪽으로 끼고 오르면 백암 약수터가 나오며 눈앞에 정자가 나온다. 여기서 낮은 왼쪽 능선으로 올라 붙으면 ‘권등암장’ 및 ‘교육암장’을 맞이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