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사우회보지에 쓴 글
페이지 정보
작성자 허용범(67기) 작성일08-09-30 13:05 조회3,116회 댓글0건본문
허용범 국회대변인 (수습 26기. 전 워싱턴특파원)
yongbomheo@na.go.kr
작년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자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기자 시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 거기 있었다. 대개 식은 밥을 물에 말아 혼자서 아침을 먹고, 시간을 보냈다. 갈 데도, 오라는 곳도 없었다. 밤에는 다음날 일부러 늦게 일어나기 위해 일부러 밤을 샜다. 멀쩡하던 조선일보 워싱턴 특파원이 1년 새 전형적인 정치낭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때 암벽등반을 시작했다. 총선에서 실패한 뒤 한 달쯤 뒤인 5월 중순. 안동에서 대충 선거 뒷마무리를 하고 올라오자 월간조선에 함께 근무한 적 있는 이동욱씨(현 한국갤럽 전문위원)가 암벽등반을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35만원 수업료를 지불하고 기본 장비를 산 다음,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그러니까 인왕산 맞은편의 연세대 뒷산인 안산으로 갔다. 5월 중순부터 5주간 매주 일요일마다 그 산자락에서 암벽등반 교육을 받았다. 일 년 중 한겨울만 빼고 계속 5주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권기열 등산학교> 코스는 논산훈련소보다 더 힘들었다.
매듭법과 하강법부터 시작한 교육은 3주차에 첫 ‘야간실전등반’을 했다. 안산의 남쪽 사면은 약 80m 되는 수직 절벽이다. 정상에는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다. 토요일 밤 12시, 남쪽 절벽자락에 붙어 기어 올라가기 시작한 첫 실전등반은 일요일 새벽 6시에 봉수대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났다. 80m를 기어오르는 데 6시간! 등산복은 쥐어짜면 물이 흐를 만큼 땀으로 적셔졌고, 날카로운 바위에 까진 손마디에서 피가 흘렀다. 정상에 도착하자 마침 아침 해가 잠실 쪽에서 떠올랐다. 성취의 감격에 겨운 우리 동기들(12명)이 얼싸안고 파이팅을 외치고 기념사진을 찍을 때, 아침 산책객들이 운동화차림으로 올라왔다.
아이들도 10여분이면 올라갈 수 있는 그곳을 오르는 데 우리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처음해보는 실전암벽등반, 그것도 밤을 꼬박 새워 한다는 것은 엽기 그이상의 무엇이었다. 안산 남면 절벽에 붙어 있으면, 서울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휘황찬란한 서울의 야경을 발아래 깔고서, 고통과 공포의 연속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6시간의 사투(死鬪) 끝에 봉수대에 올랐을 때, 땀과 눈물로 뒤범벅된 거지꼴 어른들의 기괴한 모습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왜 이 고통스런 도전을 스스로 하는가.”
그 물음에 답을 해 가는 과정이 아마 내 인생일 것이라고 나는 여기고 있다.
대학시절 산악회를 하지 않았다면, 암벽등반은 보통 40대가 하는 취미다. 30대도 꽤 있지만 역시 40대가 주축이고, 50대, 60대도 적지 않다. 인생에서 뭔가 알게 되는 나이에 관심을 갖는 취미인 셈이다. 암벽등반을 배우겠다고 학교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직업도 정말 다양하다. 개교 8년째 1500명 이상이 다녀간 권기열 등산학교 졸업생에는 없는 직업이 없을 정도다. 의사, 판사, 교수에다 스님, 신부님도 섞여있다. 우리 동기는 12명으로, 국회의원 낙선자, 영국 옥스퍼드 박사인 대학교수, 여성 동양화가, 증권회사 이사, 사설학원 원장, 포클레인 기사, 대형화물차 운전수, 삼성전자 여직원, 거제 삼성중공업 엔지니어 등으로 이뤄져 있었다. 모두가 안정적 직업을 가진 사람들인데, 무슨 동기에선가 끌려 바위를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나는 5주간의 등산학교를 졸업하고도 갈 데가 없어 학교에 나갔다. 조교로서 후배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졸업생들과 만든 암벽클럽에도 나갔다. 바위를 타면서 내 삶은 조금씩 새롭게 정리가 되었다. 평생 수평의 세계에서만 살아오다 처음으로 수직의 세계로 들어서자 보이지 않던 사물이 보이고, 흔하게 보던 산도 다른 각도로 보였다. 세상도 그랬다. 나는 세상의 넓음과 다양함에 비로소 눈을 뜨는 것 같았다.
사람은 직업의 노예라는 말처럼, 나는 선거 때도 기자 티를 못 벗었었다. 선거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캐묻지 않고 대화 나누는 법을 알게 되었다. 뉴스거리가 되느냐로 화제의 가치를 판단하던 습성을 버려나가기 시작했고, 뻔히 다 아는 세상의 얘기도 개개인의 삶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로 작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대한 조직의 보호 없이도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는 많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사막이나 밀림에서 혼자 생존해가는 동물처럼 나름대로 놀라운 삶의 지혜로 무장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자로서 내 능력은 사실 조선일보라는 간판이 결정적이었음을 을(乙)의 입장이 되면서 실감나게 깨달아간 시기이기도 하다.
암벽타기가 여느 취미와 다른 점은 서로 생명을 나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이 바위를 타고 오르면 다른 쪽 누군가가 줄(자일)을 잡아줘야 한다. 추락에 대비해 줄을 잡아주는 그 행위를 ‘빌레이’라고 하고 그 사람을 ‘자일 파트너’라고 하는데, 만일 자일파트너가 빌레이를 잘못 봐 줄을 놓치면 바위를 오르는 사람은 목숨을 잃거나 영원히 불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암벽등반에서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결코 서로 자일파트너가 될 수 없다.
나는 내가 신뢰하게 된 자일파트너들을 통해 그들이 사는 삶의 방식과 체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지난 18년간 기자로서 걸어온 내 삶의 방식과는 다르게 살았는데, 바로 그런 삶이 나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어 주었다.
국회의원 선거 실패는 내 삶에서 큰 추락이었고, 나는 시간이 갈수록 열패감에 사로잡혀갔다. 안동의 독특한 성씨 문화니, 선거구도니, 그런 말은 나를 위로해주지 못했다. 나는 여러 차례 내가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새로운 세계로 나선 것을 솔직히 후회했다. 아무데도 갈 곳이 없어 10여개월 산에 오르내리다 드디어 생활비 걱정을 하게 되었을 때, 견디기 어려운 상실감이 정신을 짓눌렀다.
바위타기는 그런 심리상태의 내가 찬찬히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바위는 자신을 비춰보는 불투명한 거울이라고 한 말은 너무도 정확하다. 암벽등반의 본질은 추락의 위험성에 있다. 단 하나의 실수라도 생명으로 연결되는 그 추락의 특성이 등반자의 완전한 몰입을 요구한다. 또 추락의 위험성에 내포된 정신적 긴장이 등반과정에서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가져다 준다. 그런 극도의 긴장과 몰입이 바위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고, 실제 몇 번 아찔한 추락을 경험하면 점점 강해지면서도 겸허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인생의 한 고개를 넘으며 심하게 추락을 먹고서야, 내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진지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알고 보면 내 자일파트너들보다 별로 잘난 것이 없고, 혼자 설 능력도 모자라면서, 조직의 힘을 나의 성취로 착각하지 않았나, 많이 생각했다.
우리는 성공으로부터 성취의 기쁨을 느끼지만, 실패했기 때문에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참 많았다. 내가 실패해 눈물을 흘리자 비로소 실패로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하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대하는 법을 알게 되었다.
어떤 선배기자는 말없이 점심을 사주고선 헤어질 때 “돈 없지?”라며 수표 몇 장을 손에 쥐어주었다. 한 국회의원은 “얼마나 힘드시겠느냐. 내가 그 마음을 안다”며 여의도의 한 다방에 앉아 2시간도 넘게 나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회사의 어느 대선배는 술을 많이 줄였다는데, 저녁을 사주겠다고 나를 불러낸 그날은 “너무 낙심하지 말라”며 2차까지 술만 들이켰다. 다음날 걱정이 돼 전화를 했더니 그분은 출근을 못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는 과연 진정으로 실패한 사람을 위로해 보았는가”라고 되묻곤 했다.
내가 조선일보를 떠난 것은, 어떤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 때문이었다. 나는 나이 마흔을 넘어, 혹은 예순을 넘어, 바위에 오르는 한사람 한사람의 가슴에서도 그런 갈망을 느꼈다. 숨을 헐떡이며 바위를 껴안는 그 모습에서, 천길 낭떠러지 절벽에서 온몸을 땀으로 적시는 투지를 보며, 인간을 생명체로서 살아 숨쉬게 만드는 것은 결국 무엇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슬픈 의지라고 생각했다. 실패와 성공은 그 도전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후적 판단이다.
바위에서는 한번 미끄러졌다고 포기하는 법이 없다. 뒤로 물러나 더 넓은 시선으로 가야할 길을 연구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돌기와 균열을 찾아, 더 현명하면서도 악착같이 딛고 일어서야 할 뿐이다. 바위에서는 결코 잔머리 꼼수가 통하지 않지만, 무지막지한 저돌성도 추락을 자초하는 길이다. 바위에서는 한없이 겸손하고, 현명해야하며, 몰입해야 한다. 그래서 암벽등반은 힘과 기술이 아니라, 결국 마음으로 하는 행위라고 한다.
나는 이제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정상을 향해 자일을 걸 준비가 되어 있다. 더 넓은 눈으로 바라 보고, 더 겸허한 자세로, 현명하게 나를 단련시켜 나가려 노력한다.
지난 2월 국회대변인이 된 뒤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에는 산에 가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내가 졸업한 등산학교에도 가고, 북한산 바위도 타고, 인천국제공항 너머 무의도 해안절벽도 오르내렸다. 나는 이젠 초보수준을 넘어서 후배들에게 등반의 시스템을 가르치고 가끔 선등(先登)도 서곤 한다. 깎아지른 절벽을 쳐다보면 다리가 후들거리다가도, 그 절벽에 박쥐처럼 매달리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단계에는 이르렀다. 좀 된다 싶어 까불다가, 벼랑으로 추락하는 바람에 목발을 짚고 다녔고, 바위에 생살이 부딪쳐 파인 흔적들이 수십 군데 남아있는 정강이 상처들을 자랑삼아 보여주곤 한다. 출렁거리는 뱃살에 근육하나 없어 보이는 팔뚝으로 무슨 암벽등반을 하겠느냐 싶지만, 나는 바위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좋아 “등반 5시간, 뒤풀이 10시간!”을 외치며 그들을 따라다니고 있다.
(끝)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